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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을 부정하라 / 김매화

2008.09.02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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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자신을 부정하라  /  김매화

                      구원! 어디서 오나<요 3:16-21>
  우리가 구원을 이야기 할 때 여러 가지 정의를 내릴 수 있겠으나 여기 이 책에서는 강태국 박사가 구원이란 말을 세가지 종류로 구별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그 첫째는 정치적 해방을 말할 때에 혹은 포로에서 해방을 받을 때 이며, 둘째는 육신의 생명이 위기에서 구출될 때, 세째는 영혼이 구원 얻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기독교에 있어 구원문제는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데, 구원관에 있어 타 종교와 다르며 구원관에 있어 이단과 정통이 구별된다고 할 만큼 중요한 문제인데, 강태국 박사는 이것을 아주 중요하게 언급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구원관은 철두철미하게 그 영혼의 구원에 있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면 영혼의 구원이란 어떤 것인가? 그러면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그 근본은 어디 있는 것인가? 여기서 정통기독교가 판명나는데, 칼빈주의적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주권에 관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강박사도 구원의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근원은 다만 하나님 뿐이신 것을 알게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구원코저 하시는 그 대상은 누구인가? 요3:16에는 세상이라고 하였다. 구원의 대상이 전 인류 중에 한 사람도 차별이 없이 또 예외 없이 인류 전체가 구원의 대상이 된 것은 전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한가지 이유는 전 인류 중에 누구 한사람도 자기 자신의 능력이나 공로로써는 죄로 말미암은 그 사망 아래서 구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구원의 동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면 죄로 인하여 사망 아래 있는 전 인류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사랑인가? 성경에는 세 종류의 사랑이란 낱말이 있으니 그 첫째는 이성간의 사랑으로써 곧 에로틱한 사랑을 말하는 거서이요 둘째는 도덕적이요 윤리적이며 철학적인 것을 말할 때의 사랑 필로하고 하고, 쎄째는 아가페라는 사랑으로써 이는 곧 하나님께 속한 사랑이다. 이 사랑이 곧 전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동기가 된 것이다. 그러면 이 사랑이 우리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 하나님은 죄아래 있는 인류를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화목제물로 우리에게 보내셨다고 하셨다. 이상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구불변의 사랑을 인하여 세가지 귀한 열매를 얻었으니 그 첫째는 화목이요 둘째는 구원이며 셋째는 기쁨이다. 구원의 방법은 첫째는 예정에 관한 것이고 그 둘째는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것이다. 첫째로 사랑의 하나님은 구원하실 자를 전 인류 가운데서 택하셨다. 우리 기독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심을 받은 것은 우리에게 어떠한 공로가 있기 때문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기쁘신 뜻대로 택하신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목적은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거룩하고 흠없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하시려고, 자녀가 되게 하시려고,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시려고 하심. 이상은 하니님께서 우리를 기쁘신 뜻대로 영원한 사망의 자리에서 택하시고 예정하신 목적이다. 구원의 조건은 오직 신앙 뿐이다. 구원은 오직 신앙에 있는 것이요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행위 즉 실천이 없는 신앙은 참신앙이 아님을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이다. 구원의 결과는 요한 사도가 말한 그대로 영생이다.


                  그 길을 누가 알리요<요 14:1-6>
  그 다음에 중요한 문제는 내세관인데 이것은 우리의 미래와 관게되어 있고 또 구원의 최종적 완성으로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성경의 진술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가신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다 없어졌다. 왜 그런고하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우리의 죄로 인하여 저주받은 우주였기 때문이다. 바다도 없는 세계이다. 바다란 것은 곧 공포의 상징이다. 주님의 가신 길은 외로운 길이다. 사망의 길 이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이 길은 예수님에게도 주어졌거니와 예수를 따라가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주님이 가시는 곳과 그 길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그 곳과 그 길을 우리의 이웃을 비롯하여 전 세계에 알리는 그것이 우리의 책임이요 의무이며 또한 사명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 일을 최후로 명하셨고 또 우리는 그 곳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언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섭리<마 26:26-28>
 칼빈주의에 있어 예3정과 섭리 문제는 우리의 구원 선택과 관련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란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피조물들을 보존 하시며 전 세계를 통하여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찰하시며 또한 그 모든 피조물들이 저들에게 주어진 최종의 목적을 향하여 나가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과업이다. 하나님과 아담과의 언약(계약)은 축복의 언약이었으며,성장과 번영의 언약을 주셨다. 세째의 언약은 지배의 언약이다. 두번째 노와의 언약 또한 아담에게 주어진 언약과 대동소이하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생장의 언약과 지배권의 언약을 주시는 동시에 생명의 존엄성을 기억하고 인권을 존중히 여길 것을 조건으로 하였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렸을 때에는 그 사람에게서 그 피의 값을 찾으시겠다고 하셨다. 세째로 아브라함과의 언약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인하여 열국의 믿음의 조상이 될 것 으로 약속하신 것이다. 모세와의 언약은 율법을 통하여 주어진 것이다. 우리와의 언약은 다른 말로 새 언약이다. 이 언약의 창시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이 언약을 세우셨다. 그 언약은 사죄의 언약이며, 천국의 언약이며, 재림언약이다.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 바쳐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찬송을 영원히 드려야 할 것이다.


     죄인을 찾으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랑<눅 15:1-24>
  우리는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잃어진 존재이다. 물론 우리가 죄를 지어 하나님의 품을 떠나 나왔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당신의 품안에 받아 들이시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죄인을 찾으시는 하나님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목자처럼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하신다는 비유로 이것을 설명하셨다. 그것이 비록 하나님을 반역하고 떠난 죄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기를 원치 아니하시고 찾도록 찾으신다. 그리고 죄인 하나를 찾으셨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모든 천군 천사들과 함께 기뻐하시는 것이다. 죄인을 기다리 시는 하나님은 방탕아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죄인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 방탕아가 돌아오면 아버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방탕아를 환영한다. 하나님은 이토록 무한대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집을 떠난 아들 곧 부모의 명령을 거스리고 집을 떠난 아들 그 뿐만 아니라 부친에게 상속받은 귀한 재산을 허랑방탕으로 다 허비하고 돌아온 방탕아를 받아들이고 안 받아 들이고는 아버지의 권한에 있는 것이다. 또한 돌아온 죄인들과 화목하시기 위하여 저들의 죄의 댓가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지불하게 하셨다. 그리고 원수된 인생과 화목을 일룩하신 것이다.


                예수의 예루살렘 개선<마 21:1-11>
예수님의 지상사역은 철저하게 고난과 수고로 일관된 삶이었다. 그러나 에루살렘에 개선하실 때 만큼은 많은 사람들의 찬송의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것이 정치적인 왕으로서의 메시야를 영접한 것이었지 고난 받으러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닝을 알지는 못했다. 결국 에수님은 그렇게 영접하던 그 군중들에 의해 바나바와 맞 바꾸어져 십자가에 처형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아이신 것을 만천하에 알리시려고 십자가의 제일보로서 예루살렘에 입성 하셨다. 또한 이것은 때가 이르러 예언의 실현인 것이다. 예수님은 나기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성에 입성 하셨는데 그 이유는 평화의 왕이신 메시아를 상징하기위함이요, 고난의 메시아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하는 군중들은 진심으로 예수를 영접하는 군중들과 예수의 행하시는 이적기사를 구경하기 위한 군중, 그리고 예수를 반대하며 살해하기 위해서 따르는 세종류의 군중들이 있어다. 이러한 군중 들은 의복을 길에 깔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면서 환성을 지르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가장높은 곳에서 찬송 하리로다.¡±라고 하며 이렇게 예수를 찬양하며 맞이 하였다. 그러나 몇일후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이렇게 우리들은 예수님을 배반 하였다.


                    심판의 경고 <마 21:28-41>
예수께서 마지막 삶을 보내시던 그 때에 에수께서 마지막에 대한 여러 가지를 말씀 하셨다. 예수의 공적 전도의 최후의 날은 기원 30년 4월 4일 화요일이다. 이 날에 예수님의 권위에 도전하여 오는 예루살렘의 종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심판의 경고를 내리셨다. 두아들의 비유를 통하여 순종과 불순종하는 기독자들 순종하고 믿는 유대인, 순종하고 믿는 이방인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있다. 유대인들은 선민으로 자처하지만 불순종하며, 율법을 강조하면서 사랑은 식어있었다. 이러한 유대인들 포도원의 비유를 통하여 하나님의 명령과 인간의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예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언제나 신령한 영적인 열매인 것을 우리는 늘 기억하여야 하고 신령한 결실을 맺어 하나님께 드리는 영적인 그리스도인 들이 되어야겠다.

       
           성만찬석상의 그리스도<마 26:17-29>
성만찬은 우리를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의 구체적 표현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우리들에게 주님이 오실때까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의복음에서 벗어 나지 말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성만찬의 역사적 배경은 구약성서에서 찿아볼수 있는데 두 가지 사실을 그 실례로 들 수있다. 첫째는 인류의 조상의 범죄를 가리우기 위하여 희생을 당한 짐승의 피요, 둘째는 자기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아벨의 번제단에 희생의 제물이된 짐승의 피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 두 짐승이 흘린 피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갈보리 언덕 골고다 산상의 십자가의 번제단에서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만찬의 유래는 언제 부터 였을까? 성경에서는 무교절이라고 하며 애굽의 초태생을 치는 천사가 문설주에 피를 묻힌 집은 넘어가서 재앙을 넘겼다고 해서 유월절 이라고도 한다. 예수님의 최후의 성만찬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에게 떡과 포도주를 나누었다. 그 성만찬의 내용은 십자가(희생), 부활을 의미하는 성취된 새언약을 의미 한다. 떡은 예수님의 살이요,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가리키는 것이다.


                      고독의 예수<막 14:32-42>
예수님이 보여 주신 겟세마네의 기도는 결국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의 십자가의 ㅇ떠함을 깨닫게 해준다. 힘들고 어려운 십자가를 앞에 놓고 진정 인간적인 고뇌와 기도로 매달리는 주님의 모습을 통하여 우리는 역시 우리에게 놓여진 십자가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명을 깨닫는 것이다.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그의 번뇌와 고민과 고난과 고독에서의 최후의 승리였다. 또한 겟세마네의 기도는 하나님에게 대한 절대 복종의 행위이다. 예수님의 고독은 자신이 질 십자가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마음에 더욱 고민과 고독을 주는 것은 사랑하는 제자들의 무지였다. 또한 3년간 동고동락한 제자의 반역이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질때 제자들이 살기 위하여 사방으로 흩어 졌을때 예수님은 고독할수밖에 없었다. 더욱 큰 고독은 십자가상의 고독이다. 사람들에게 버렸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조차 버려졌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독을 생각 할 때 정말 눈물이 흐른다. 그 십자가 사건을 생각 할 때 마다 더욱 예수님을 사랑 해야지 하고 다짐한다.

 

                  아버지의 원대로<막 14:32-42>
에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뒤에 마지막으로 하신 기도의 말씀은 내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해달ㄹ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 우리의 기도와 다르다. 대개의 경우 소원을 아뢰는 것이 기도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에수께서는 포기하는 기도를 보여 주셨다. 소원이란 사람에 따라서 다르다. 그 뿐만아니라 사람의 소원은 자주 변하기도 한다. 세상에 난 모든 사람들은 다 소원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일평생을 두고 한개의 소원을 이룩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다. 성경에서 자기의 원대로 걸어간 사람을 예로 들라면 롯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리고 발람이나 가롯 유다 같은 사람들일 것 이다. 이러한 세상을 향해간 사람들은 세속적인 부귀와 명예와 공명에 뜻을두고, 세속적인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하고 달음질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의 말로는 다 비극으로 마치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자기 스스로 걸어간 사람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과 같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모두 영화로운 삶이 되었다.


                   법정의 예수<막 15:1-20>
에수께서 사람의 법정에 서신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ㅇ없다 모든 사람을 심판 하실이가 가소롭게도 사람들의 심판을 받고 계신 것이다. 하지만 그분이 사람의 법정에 서신 것은 우리를 대신 하여 서신 것이다. 잡히신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조롱하며, 네가 하나님이 성전을 헐고 사흘만에 지을수 있다고 하였으니 한번 성전을 헐고 지어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주님은 시인도 부인도 하니하시고 침묵을 지키셨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요, 예수님 자신이 죽었다가 삼일만에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사형코져 하였으나, 저들은 사형권이 없음으로 예수님은 빌라도 법에 서시게된다. 예수님은 법적으로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예수님을 못 박으라고 소리쳤다. 예수님에게 채찍으로 때리며, 가시면류관을 씌우고, 무릎을 꿇리우고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롱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기독자는 증거 하여야 한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마 27:32-50>
 드디어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분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죄인으로 취급 받으셔야 했는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 하라고 판결을 내린 사람은 빌라도이며, 예수님이 죄가 없음을 잘 알면서도 십자가에 처형한 그의 죄는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은 바로 유대인들이었을며, 전 인류였던 것 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 좌우편에 두 강도가 같이 달리였는데 예수님께서 한 강도의 죄를 용서하여 주심은 바로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이시며, 두 강도와 함께 달리심은 전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으로서 계급이나 지위나 차별이 없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관망한 것은 전 인류 뿐만 아니라, 하늘에서 역시 관망만 하였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죄를 대속한는 대속의 제물이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최후의 유언 <요 21:1-23>
그렇게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일곱마디의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는 그 분의 십자가상의 말씀을 잘 명심 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잘 전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전할 예수님은 다름아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이시다. 이것을 전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자격 이며, 둘째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두 가지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절대로 주님의 맡기신 일을 이행할 수 없다. 기독자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들이다. 기독자들은 이 명령을 즉 주님의 최후의 유언을 실천하기 위하여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따라 전 세계에 나아가 그 유언을 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천국 노동자의 결핍<마 9:35-38>
우리는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게획을 배우고 또 노동과 땀의 가치를 배우게 도니다. 그리고 땅의 정직한을 배우게 도니다. 노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신성한 것이다. 문명의 시작으로 부터 우주개발 그리고 민족의 번영과 국가의 발전은 노동에 의해 이룩된 것 이다. 하나님은 위대한 노동자이시다. 우주의 생성은 하나님의 노동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6일동안 일하고 일곱째 되는 날에 쉬셨다고 하였다. 예수님 또한 위대한 노동자이셨다. 우주를 창조하실때 하나님과 함께 우주를 창조하시고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 되셨다. 그리고 이 땅에 오셔서는 천국복음을 위한 노동을 하셨다. 예수님을 모든 성과 촌에 다니시며 전도하는 중에 목자없는 많은 양떼들이 유리하며 방황하고 고생하는 것을 보시었다. 지금동 인류에는 유리하며 방황하는 주님을 몰라 죽어가는 영혼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노동을 계속해야한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를 보내리요<사 6:6-13>
우리는 일하기위해 부름 받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일하는 사람을 찾으신다. 이사야를 찾아 하나님의 무거운 사명을 맞기며, 자기 민족에게 주어진 심판의 선언을 하며 자기 민족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을 선포하였다. 또한 엘이의 집에 되어질 일을 사무엘에게 말씀하셔서 사무엘은 이 사실을 하나님께 들은 이 비극적인 사실을 그대로 엘리에게 전하였다. 사무엘은 그 후 이스라엘 민족의 제사장도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사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는 사람을 찾아 쓰셨다. 다윗을 부르셨고, 엘리사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부르신다. 그리고 분명한 사람들, 기도하는사람들을 택하여 쓰신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요구 하는 사람이요, 전 인류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하나님이 보내시는 사람들<창 12:1-4>
추수할 곳이 너무나 많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나 찾으시는 하나님께 반응하는 살람은 많지 않다.  세상에는 허다한 사람들이 많이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 하나님은 옛날이나 오늘이나 보내고자 하시는 사람을 찾으신다. 그러면 그 목적은 무엇인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이 유일하신 유일신인 것을 알리셨고, 능력의 하나님을 증거 히기 위하여 요셉을 애굽으로 보내셨으며, 다니엘과 그 세 친구를 바벨론에 보내셨다. 한 민족을 구출하시기 위하여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셨으며, 에스더를 바벨론에 보냈으며, 요나를 보내셨다. 또 개인 구원을 위하여 나단을 보내시고, 엘리야를 보내시고, 빌립을 보내셨다. 베드로를 보내셨다. 그리고 전 인류를 구출하시기 위하여 오늘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고 계신다.


        파수꾼으로서의 에스겔의 소명<겔 3:16-21>
성경을 보면 많은 삶들이 주의 앞에서 변화를 받고 그리고 헌신의 삶을 살았다. 하나님을 만나고 은혜를 체험한 자는 누구라도 그이종이 되는 것이다.  느부갓네살은 인간인 에스겔을 잡아 왔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권능과 그와 함께 하며, 하나님의 신이 그에게 임하였더니 위대한 선지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포로된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위하여 예언케 하신 것이 아니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백성들을 위해서도 예언케 하셨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범죄의 길을 떠나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하여 예언자 곧 파수꾼을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시기 위하여 에스겔을 파수꾼으로 세우셨다. 이와같이 현대에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어둔 시대에 우리를 파수꾼으로 세우셨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빌 3:10-14>
바울 사도는 푯대를 향하여 가는 삶을 산다고 자랑하였다. 이 땅의 썩어질 목표가 아니라 주님을 향하는 저 높은 곳을 뱌라는 신앙을 가질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그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이요, 새 예루살렘이며, 그 뿐만아니라 모든 기독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영원의 장막으로서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 기독자들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하여 살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일하며 받던 모든 박해의 눈물을 여기에서 하나님이 친히 닦아 주실 것이다. 이 눈물은 곧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걸어가는 우리들이 이 세상의 사타으로 더불어 싸우며 상처 받으며 흘린 것들이다. 우리가 향하여 가는 저 높은 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으로서 우리 주님이 친히 준비하신 곳이다. 우리 기독자는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걸어가고 있다. 왜 그런고하니 그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요, 또한 우리 주님이 준비하신 곳이기 때문이다. 저 높은 곳은 우리 기독자의 최고의 목표이다.


                기독자의 정도<빌 1:27-30>
기독자는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동시에 두곳에서 사는 사람이다. 이말은 우리가 하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지만 우리가 속해있는 이 세상에서도 정도를 걷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사회와 국가의 안녕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전 인류가 걸어가는 공로가 있다. 물론 그 형태는 국가에 따라서 다르지만 어느 국가든지 그 민족 혹은 국민이 걸어야 할 공로가 있는 것이다. 이렇듯이 기독자에게도 행도가 있다. 그 목표는 곧 그리스도를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르 위하여 걸어가는 것이 기독자 정도란 말이다. 이것이 곧 그리스도를 위한 기독자의 순례의 길이다. 그 순례의 길은 고난이 따른다. 신앙과 고난은 둘다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진 것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독자에게 주어진 고난은 기독자의 무쌍의 명예이요 영광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또한 우리의 고통을 인하여 그리스도 자신이 고통을 받으시는 것을 생각 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그 고난을 감사히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들 중에 가장 큰 은혜는 신앙이다. 우리의 신앙은 고난이 함께하는 신앙 이다.


                기독자의 푯대<빌 3:1-16,딤후 4:5-8>
우리 기족자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향방없는 삶을 사는 자가 아니요 분명한 목표를 가짐ㄴ자로서 세월을 아끼고 또 생액 가운데에 올바른 일을 하기 위해서 이다. 기독자의 경주의 목표는 그리스를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삶의 목적이요 푯대요 생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되려고 하는 것이 그 경주의 목적이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을 파악코저 하는 것이 또한 그 목적이다. 즉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능력을  자기의 것으로 하고 또한 자기 자신이 체험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이란 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 사실이 우리의 신앙에 미치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함을 알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 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하심과 같이 자기 자신도 부활의 은총을 얻고 저 하는 것이 그의 목표이다.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죈 그것읅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할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으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 하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시 19:1-14>
우리가 사난 죽으나 이제는 우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닌 이상 우리는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이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한 인간의 의무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 즉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대한 예배라고 하면 그 상대를 통하여 언제나 하나님을 즐거워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의 생활 전부인 것이다. 자연계는 영원 전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요, 반드시 시작이 있는것이다. 이 대 자연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완전무결성을 나타내어 보여 준다. 즉 그 창조의 역사를 통하여 그 창조에 완전무결한 창조자의 능력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 인것이다. 전 세계으 모든 인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되었다. 열방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이다.

 

          다만 그리스도를 위하여<롬 14:7-12>
우리거 육신을 입은 고나게로 육신을 위해서 살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인간이 육신 뿐이라면 우리는 짐승과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에게 있어서 의시주의 문제는 제일 중요하다.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필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의식주 문제로 인하여 범죄를 시작한다. 우리 조상도 사탄의 유혹을 받아 금단의 열매를 따먹었다. 그리고 무화과 나무잎으로 의복을 지어 입었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구원하여 주셨다. 그렇이 때문에 이제 하나님 앞에 우리를 산제사 드리고 그런 기독자의 첫째 할 일은 이 세속적인 세대를 본받지 말며, 둘째는 마음을 새롭게하여 완전히 변화됨을 입을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선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이제는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고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사는 삶이 되어야 할 것이다. 스데반이 순교 할 때 그는 사경에서도 영광의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하였고 또한 원수를 사랑하는 참된 그리스도의 아가페의 사랑을 증거 하였다. 그러기에 성경은 그가 죽었다고 하지 아니하고 잔다고 하였다. 우리의 전 생애을 통하여 우리 전부를 드리는 산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밧모로 가자<계 1:9-20>
시도요한은 우리와 같이 종말을 사는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깨우쳐 주는 사도이다.그는 유배지 밧모에서 우리에게 게시록을 기록해 주었다. 그는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는 섬에 있었더니¡± 이 말씀 가운데는 밧모라는 장소와 이곳에 정배 오게된 사도 요한의 정체와 또한 사도 요한이 밧모에 정배오게 된 이유를 말하고 있다. 요한의 자기 소개에서 나 요한은 너희의 형제요 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사도 요한의 마음을 엿볼 수가 있다. 그는 실로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니라¡± 라고 하신 사도 바울의 말씀 그대로 지극히 겸허한 마음을 가지셨다. 그러기에 그는 자기가 사도라고 하는 고귀한 직권을 사람들 앞에 내세우려 하지 아니하였다. 그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이다.

 

                 복음의 증언<계 11:3-13>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 할 때에는 그에 따른 의적 결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하였다는 말이 있다. 그뜻은 무엇일까?  굵은 베옷을 입는데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참회를 의미 하는 것이요, 둘째는 심판이 가까운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복음의 증인은  언제나 이 두가지 사실을 사람들에게 외치지 아니 할 수 없는 것이다. 자기의 죄를 참회하지 아니하는 사람에게 심판은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복음의 증인은 감람유 처럼 그 자신이 바스러지고 녹아지기 전에는 복음의 빛을 발할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생각 할 때에 그 감람유는 곧 성령의 기름을 가리킨다. 복음이 증인은 호화찬란한 사치스런 세대의 풍조를 따라서는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제단을 쌓고 있는가?<창 4:1-15>
아브라함은 장막을 옮길 때 마다 제단을 쌓았다고 기록 되고 있다. 하나님을 옳바로 섬기는 기독자들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자들이지,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제단을 쌓고 자기를 위하여 예배드리는 자들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위하여 제단을 쌓는 예배는 받지 아니하신다. 가인의 제단은 선한 제단이 아니다. 가인의 제사는 자기 중심적인 제사이다. 가인의 제사는 인본주의적이며, 그 제사는 피흘림이 없었다. 피는 즉 생명이다. 피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신다. 인간이 범죄한 그 죄의 댓가는 사망이다. 사망의 자리에 있는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그 생명을 대신하는 피의 제사가 필요한 것이다. 사울의 제단에서도 볼수 있듯이 사울은 제사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제단을 쌓으려고 하였다. 이것은 자기를 위하여 자기 제단을 쌓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산 것을 볼 수 있다.


                  종  의  도<요 13:1-15>
에수께서 보여 주신 삶의 원리는 종의 도이다. 종의 도란 섬김을 받는 자리가 아니요 섬기는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종이란 자기를 위하여 있는 자가 아니요 오직 상전을 위하여 있는 자이다. 그러기에 종이란, 아무런 자유가 없는 자이다. 사도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말할 때에는 늘 종이라고 하였다. 즉 원어에 둘로스란 말이다. 둘로스란 종이란 뜻이다. 종 노예시장에서 끌려온 종이다. 그러기에 그는 그 상전에게 있어서 한 도구로 사용되는 지극히 미천한 존재이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대한 사도 바울의 태도는 언제나 이러한 종의 태도로 나타났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전 생애를 통하여 주인되신 주님의 명령대로 실천한는 종의 도를 걸어갔다. 종의 도는 희생이 없이는 실천 할 수 없다. 우리 주님은 종의 도를 희생적으로 실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예수 그리스의 정체를 저들에게 표상적으로 보이신 것이다.


                 봉사와 기적<왕상 17:10-16>
 이스라엘왕 아합 시대에 3년간 비가 오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사르밧으로 가라고 명하 사르밧의 기적이 일어났다. 수산 도성의 기적은 유대인의 철두처미한 애국심이요, 자기 민족을 위한 희생의 정신이며 철두철미한 하나님의 선민의식이요, 굳건한 신앙심이다. 이 사상은 모르드개 한 사람의 사상만이 아니요 그 민족 전체의 사상이다.  많은 기적 중에서 십자가의 기적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기쁨이요 소망이다. 인류의 구원은 예수의 봉사적 십자가의 희생에 한해서만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봉사를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 14:3-99>
 사람이 살아가면서 5가지의 인간상이 있다. 첫째는 자기 자신의 이기심을 만족 시키기 위하여 평생 동안 타인에게 해만 끼치다 가는 사람들이며, 둘째는 다른 사람에게 해도 이익도 끼치지 아니하는 무해무익한 사람으로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나타난 부자와 같은 사람이다. 세째는 다른 사람에게 해도 끼치고 유익도 끼치는 사람이다. 네째는 자기를 잊어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희생하는 사람이며, 다섯째는 예수에게 좋은 일을 하기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베다니의 마리아는 열렬한 신앙의 소유자였다.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기 위하여 예수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사랑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할 수 있는 정도까지 다 하였다고 하셨다.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고, ¡°내 장례르 미리 준비 하였느니라¡±라고 예수님은 말씀 하셨다.그리고 온천하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하는 곳이면 이 여인을 말할 것이다 라고 하셨다.


          기독자의 생애의 원칙<골 3:1-4>
기독자는 생애의 원칙이 있다. 그것은 에수께서 첫째 보여 주신 것이요 그 다음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다. 그것은 위에 있는 것을 찾는 삶이다. 우리가 위에 것을 찾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이다. 첫째, 초등학문에 대하여 죽었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보다도 더 윤리적이요 도덕적인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 왜냐하면 이는 기독자의 생애에 나타난 신앙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둘째, 죄에 대하여 죽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죄에서 더 살 수 없는 것이다.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곧 사망 가운데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엣 것을 찾아야 할 것이다. 세째, 세상의 정욕에 대하여 죽었다. 네째, 세상에 대하여 죽은 자이다. 그러나 또한가지 위엣 것을 찾아야 할 이유는 그리스도와함께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이며, 산 소망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 버려야 한다. 그리고 새 사람의 생활에 힘써야 한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또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을 한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엣것을 찾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정병<딤후 2:1-13>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 부름을 입었다고 하였다. 우리가 군사로 부르심을 입었기에 군사로 다닌는 자는 부른자를 기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강박사는 익러한 그리스도의 정병이야 말로  군인 중의 군인이라고 했다. 군인 가운데는 두 종류의 군인이 있다. 용병과 정병인데 용병이란 것은 돈을 받고 싸우는 군인들이요, 정병이란 것은 조국을 위하여 또는 민족을 위하여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전장에 출전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용병은 위급하였을때 자기의 생명을 아끼기 때문에 싸우지 아니하고 도피하는 자이다. 그러나 조국을 위하여 혹은 민족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군인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군인들이라고 해서 다 정병인 것은 아니다. 정병을 얻는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군사의 자격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이다. 자기의 영광이나 입신양명이나 혹은 부귀공명을 위해서가 아니요 다만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와 함께 고난을 받자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병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소유한 자이다. 겸허한 마음과 자기 부정의 마음, 복종의 마음, 충성된 마음을 소유한 자이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자는 그리스도의 정병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고난에 참여하는 자이다.


            그리스도를 위함이라면<빌 1:12-26>
바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바울의 전 생애는 다만 그리스도를 위하여 또한 그리스 안에 있는 기독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만 생존의 가치와 의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위함이라면. 바울에게 있어서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위해서라고 하면 죽음 또한 그리스도를 위함이다. 바람에 움직이는 갈대와 같이 변하기 쉬운 정박한 의지를 가진이가 아니다. 요한 또한 그런 삶이었다. 헤롯의 신하와 당시의 교파에 노예가 되어있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들 처럼 높은 자리에 앉은 부패자도 아니었다. 예수그리스도가 전 생애를 통하여 고난을 받으셨으니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기독자들도 또한 고난 받는것은 당연하다.


             기도자의 경주  <고전 9:24-27>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삶에 대하여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 것인가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기에 임하는 경주자오와 같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최선은 기독자의 경주에 필요한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경주자에게 필요불가결의 요소이다. 첫째, 기독자는 경기하는 자들이다. 경기하는 기독자의 상대는 사람마다 다르고 또한 그 상대방의 수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어떠한 때에는 위정자들이, 어떠한 때에는 재벌가들이, 어떠한 때에는 과학자들이, 어떠한 때에는 종교가들이, 어떠한 때에는 문예가들이, 어떤때에는 철학자들이, 때로는 같은 직장의 동료들이, 어떠한 때에는 가족들이, 때로는 자기 자신이 자기의 상대자가 된다. 두번째, 장소는 기독자가 경주하기 위하여 마련된 장소는 그곳이 어디든지 자기 자신이 처해있는 곳이 경주장이다. 세째, 코치는 경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에덴 동산에서 경주할 때에 그에게는 두 코치가 있었다. 하나는 선악과를 따 먹으면 인생의 경주에서 패가 망신한다. 네째, 실천 즉 경기는 코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다. 다섯째, 관객은 하늘의 천군 천사들이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에 4:15-17>
기도외에는 이런 류가 나갈 수 없다고 주님이 말씀 하셨다. 이 말씀은 기도한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살필때에 우리는 비로소 죄인이요 불결한자이며 불의한 자임을 알게 된다.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생각 해야 한다. 예수님의 생애는 겸손한 생애였다. 또한 교회를 위하여 눈물을 많이 흘렸다. 유대인의 박해로 인한 모략과 중상과 허위와 이간질 등으로 인하여 모든 허다한 시련들을 참고 또 참았다. 그분은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대하라고 하셨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대하여야 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조국도 생각 하여야 한다. 기도하는 마음은 인류의 평화를 가져올 것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자<마 7:13-14>
우리가 가야할 길은 이미 주님께서 성경에서 정해 주셨다. 그 것은 좁은 길과 좁음 문이다. 사람들은 넓은문 넓은 길 로 다니기를 좋아 한다. 좁은 문과 좁고 험한 길을 갈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넓은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멸망이란 것은 장차 없어진다는 것이다. 즉 영원히 있을 것이 하니고 일시적이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세속적인 문들, 즉 이 현실적인 그 문이 장차 없어질 멸망의 위기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문을 향하여 달음질하고 있다. 좁은 문은 기독자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그 문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우리는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얻는 기독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의 뜻이면 <약 4:1-17>
 인간의 계획이나 이상 그리고 뜻으로는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인간의 계획은 성취 할수도 없거니와 실패 할때가 더 많다. 그 이유는 저들의 사업과 계획에서 하나님을 제외하여 버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들을알지 못한다. 아무도 자기 생명을 보장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바로 죽기 전 까지도 울고 웃고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래 부르며 또 일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으려고 애를 쓴다. 우리는 이러한 우리들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야 한다.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자는 주의 뜻을 따르는 자들이다. 우리는 이 두가지 길에서 자기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길을 쫒을 것이다.


                예수를 찾는 눈물<눅 23:26-29>
 인생은 무엇인가 찾는 것이다. 세상에 난 모든 사람들은 한사람도 예외없이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물론 그 찾는 것은 사라에 따라 다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찾고 있는 모든 것을 우리는 세가지로 분류 할 수 있다. 이 세가지 중에 보편적으로 찾는 것은 자기를 위한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자기도 위하고 동시에 남에게 즉 사회에 공헌을 하기 위하여 찾는 것이다. 그리고 세째는 자기도 위하고 남도 위하고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예수를 찾는 것이다. 사람들 중에는 지식으로 예수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성경을 통하여 예수를 목격한 자도 많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받들이는 자들이 적다. 그러나 예수를 찾는 사람들의 눈물은 그 가는 길의 어떠한 박해나 죽음이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예수를 찾는 눈물이 우리의 눈에서 흘러야 한다.


            울며 씨를 뿌리자<시126:1-6 마13:1-6>
자연 법칙 그리고 농사의 법칙은 중요한 진리이다.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에 가깝다. 농부는 해마다 무엇을 파종 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계획 한다. 이러한 파종하는 농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종자이다. 따라서 그 종자를 장 선택하고 또한 잘 보관하여 두었다가 파종의 시기가 오면 즉시 파종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가르치고저 하는 종자는 생명의 복음이다. 그러나 이 종자는 아무데나 뿌려서는 않된다. 길바닥은 심히 굳은 땅이다 이것은 곧 마귀가 와서 그 씨를 빼앗아 그로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돌밭은 말씀을 들을때에 기쁨도 받으나 뿌리가 없이 잠간 믿다가 시험을 받을 때에 배반하는 자이다. 그리고 가시떨기 밭이 있다. 이생의 염려와 재미의 유혹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하였다. 또한가지 토지인데 그것 토지는 옥토이다. 옥토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워 인내로 결실을 맺는 자 이다.


           한 마리의 참새라도<마 10:28-33>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성서적인 참뜻을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신관은 생명의 하나님 이시며, 심판의 하나님 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이시다. 예수의 인생관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아니허거늘 하물며 만물 중에 가장 고귀한 인생이 그 중에도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사역자야 더 말할 피료도 없지 아니하겠는가이다. 시대적인 교훈은 하나님은 이미 저들의 멸망을 예고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예고를 다 묵살 하였다. 여기서 현실적인 교훈을 찾아보면 국제 정세에 우리는 오래 전부터 계속되고 있는 이란고 이락의 전쟁을 보고 있거니와 가브리해역을 비롯하여 중동의 전역에서 봉기하는 지역전쟁은 날이 갈수록 고조되어 가고 있다. 국내정세또한 그렇다 이는 하나님의 진노의 채찍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나는 이 모든 현실적인 참상은 전 인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저주요, 채찍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그것이 기독자의 입장인 것이다.


       한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행 8:29-40>
 만물지중에 유인이 최귀라고 옛 사람은 말한다. 다시 말해서 만물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하다고 하였다. 그렇이 때문에 우리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주고 바꾸겠느뇨. 한 사람을 위한 주님의 명령은 이방인 에디오피아 사람 하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빌립을 보내셨다. 한 사람을 위한 성령의 역사는 빌립을 인도하여 에디오피아의 내시가 타고 가는 병거로 가까이 가라고 하셨다. 빌립의 순종함과 베들로의 환상을 통한 교훈은 한 사람을 위한 성도들의 활동이다. 바울처럼 한사람 한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 기독자의 사명이다.


              고차원의 영광<요 13:21-35>
우리는 장차 고차원의 육체를 입게된다. 하늘에 속한 형체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형체의 영광이 따로 있다 하였다. 영광은 예수님이 주신 것이다. 이 영과은 순간적으로 혹은 뜻밖에 주신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하였다. 이 영광이 고차원의 영광이다. 이 것은  특정한 한 사람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받으신 고난은 자기부정이며, 봉사의 생애이며, 희생의 생활인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부정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부정하시고, 그 자신을 죄인의 형상으로 취하셨다. 그리고 죽기 까지 복종 하였다. 십자가의 치욕을 당하시며, 봉사를 실천을 통하여 이 고차원의 영광을 얻으셨다.  예수의 영광은 영운히 시들지 않는 영광이다.


              사랑의 영원성<고전 13:8-13>
 이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이 세상에서와 그리고 내세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다. 사랑이 중요하다.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하였다. 이것은 사랑의 연속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예언의 불확실성을 가지고 있다. 방언은 필요한 것이다. 그것은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리라 라고 하였다. 방언은 믿는 사람 전체에게 주어진 것은 아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어떤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유치하다. 현재의 지식은 불명료 하다.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왜 그런고 하니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기 때문이다. 사랑엔 원수가 없기 때문이다. 사랑은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랑을 잃어 버리고 회복하지 못하면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였다. 우리는영원한 사랑을 나누어야 한다. 사랑의 회복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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